배가 볼록하니 둥근 모습이 달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달항아리.
최영욱 작가는 달항아리를 작품의 소재로 삼아 활동하고 있는 대가로,
20여 년간 줄곧 ‘카르마(Karma)’ 연작을 그려왔다. 지금도 그는
여전히 달항아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속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킨다.
겉으로는 수수하고 검박하지만 그 안에 당당함을 품은 달항아리는 그의 기억 속 상상에서 기인한다.
writer. 최행좌 photo. 황지현
사실에서 추상으로 그려낸 달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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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필연이 되는 경우가 있다. ‘달항아리 작가’로 잘 알려진 최영욱 작가도 그랬다. 2005년, 찰나의 섬광 같은 순간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대학에서 회화과를 졸업하고 풍경 위주의 작품을 그렸어요. 그러다가 나만의 작품 스타일과 기법을 찾고 싶어 유럽, 미국 등을 여행했어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한국관에서 갔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달항아리를 마주하게 됐어요. 한국관에 사람이 없다 보니 혼자 한참을 앉아서도 보고, 옆으로 누워서도 보고, 밑에서 올려다봤죠. 그때 달항아리 안에 숨겨진 당당한 품위를 발견했어요. 한번 그려보고 싶더라고요.”
최영욱 작가의 ‘카르마’ 연작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소박하고 투박한 아름다움을 가진 달항아리의 매력에 빠진 그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달항아리를 좋아했기에, 그것 외에 다른 것을 그리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달항아리는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두 반구를 합쳐 만드는 방식이기 때문에 완벽한 구를 형성하지 못해요. 이러한 달항아리의 불완전함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위풍당당함이 느껴지더라고요.”
‘카르마’ 연작을 20여 년 동안 그리면서 그의 작품은 어떻게 변했을까. 처음에는 실제 달항아리처럼 보이려고 사실적인 표현에 주력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명암도 조금 더 빼고 묘사를 덜어내려고 했죠. 조금 단조로워 보일 수도 있지만, 있는 듯 없는 듯 드러나지 않게 그리려고 해요. 최근에는 카르마를 표현한 선에 의미를 두어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기억의 상상으로 표현해낸 무수한 선
경기도 파주출판단지에 있는 그의 작업실 벽면에는 크고 작은 캔버스가 빼곡하게 줄지어 있다. 비어 있는 듯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달항아리가 보인다. 더 가까이 다가가면 무수한 실선이 교차하는 도자기의 빙열(도자기 표면의 유약 균열)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최영욱 작가의 특기다.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회화의 토대 위에 동양화의 재료와 화풍을 더해 달항아리의 광택과 균열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이를 표현하기 위해 매일 10시간 이상 작업에 몰두한다. 연필로 캔버스에 무수히 원을 그린 다음 원하는 형태가 나오면 그 선을 따라 젯소와 백색 돌가루를 섞어 캔버스에 올리고 사포로 갈아내는 과정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한다. 이렇게 매끄러우면서도 두께가 있는 달항아리의 형태가 서서히 드러나면 여기에 운명의 선을 표현해낸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기법으로 완성된 작품 위에 때로는 구름이나 짙은 안개에 싸인 풍경을 더한다. 달항아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보다 달항아리에 깃든 추억과 삶을 그린다.
“카르마를 그릴 때 내 인생의 수많은 기억을 떠올려요. 기억을 이미지로 형성하고, 그 이미지를 통해 작품에 표출되는 거죠. 내가 표현한 달항아리는 내 삶의 기억이자 이야기예요.”
그는 마치 일기를 쓰듯이 캔버스에 그린다고 한다. 어떤 날은 선으로, 어떤 날은 점으로, 어떤 날은 얼룩으로 말이다.
그의 작품 ‘카르마’는 선에 핵심이 있다. 이는 달항아리를 그리는 다른 작가와 확연히 구별되는 지점이다. 이 선들은 오롯이 그의 상상으로 표현된 것이다. 갈라지면서 이어지고 비슷한 듯 다르고, 다른 듯하면서 하나로 어우러진다.
“내 작품을 보고 누군가는 고향의 산과 바다를 떠올리고, 하늘의 별자리를 떠올리기도 하더라고요.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내 그림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그 자신 속에 얽혀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깨닫고 그 과정에서 소통이 이뤄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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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품을 보고 누군가는
고향의 산과 바다를 떠올리고,
하늘의 별자리를 떠올리기도
하더라고요.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내 그림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그 자신 속에 얽혀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깨닫고 그 과정에서 소통이
이뤄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K-미술에 대한 기대 이상의 관심
“강남구에 작업실이 있을 때 작가들과 모여 우스갯소리로 한 얘기가 있어요. ‘가장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이요. 그때는 그 말을 실감하지 못했는데 요즘 그 말이 현실이 되고 있어 신기해요. 해외에 나가면 한류뿐만 아니라 K-미술에도 관심이 많다는 걸 체감하거든요.”
K-미술을 해외에 알리고 있는 그는 요즘 개인전과 그룹전, 해외 아트페어 등을 준비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오는 5월에는 미국 뉴욕과 LA에서 전시회가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달항아리 그림은 한국인만 좋아할 줄 알았는데 세계인 누구나 좋아하더라고요. 역시 아름다움은 국경과 언어를 초월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 같아요. 더 좋은 작품으로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어요.”
요즘 그가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달항아리 자체가 아닌 집이라는 공간 속에 달항아리를 놓았을 때, 그 두 가지가 함께 만들어 내는 기운을 느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제 작품을 보고 위로를 받는다는 분들이 많았어요. 이런 분들을 위해 공공미술을 진행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이 프로젝트를 했는데 관객들이 호응해 주더라고요. 런던, 뉴욕, 파리에도 설치해 보고 싶어요.”
해외에서 더 많은 전시를 해보고 싶다는 그의 또 다른 꿈이 상상이 아닌 현실에서 이뤄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