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시선

1분 1초를 아껴주는

상품과 서비스가 필요하다
분초사회

VS

느리게 더 느리게

당신의 삶은 몇 배속인가요?
슬로 라이프

  • 얼마 전 유명 베이커리 성심당의 여름 한정판 망고시루 구매를 위한 줄서기에 3만 원을 준다는 아르바이트가 등장했다. 이 아르바이트는 1시간도 안 되어 거래가 성사되었다고 한다. 샤넬이나 에르메스 같은 명품 매장 입장을 위한 백화점 오픈런 줄서기 아르바이트에 이어 이러한 유명 음식점과 입시학원 등록 등 다양한 줄서기 아르바이트가 인기다. 일상생활에서는 캐치테이블이나 테이블링 등의 레스토랑 예약서비스가 이미 대중화되었고, 버스정류장에서 실시간으로 버스 도착 예정시간을 알려주는 서비스는 심지어 포털 서비스에서 해당 버스가 몇 정거장, 몇 분 후에 도착할지를 미리 체크한다. 이 같은 생활양식과 서비스는 시간을 분초별로 아껴 쓰려는 ‘시성비’ 에 대한 니즈를 반영한다.

    writer. 황지영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그린스버러(UNC-Greensboro) 마케팅 전공 부교수


  • 가성비, 가심비를 넘어 바야흐로 시간의 가성비 즉, ‘시성비’를 논하는 시대이다. 콘텐츠와 각종 즐길 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에 시간은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되었으며, 분초를 다투며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분초사회’는 2024년을 설명하는 대표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트렌드에 대한 반작용으로 다른 한쪽에서는 더 느리고 천천히 가는 삶을 지향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바로 ‘슬로 라이프(Slow Life)’가 그것이다. 슬로 라이프란 자연의 순리와 속도에 맞춰 여유롭고 느긋하게 사는 삶을 의미한다. 극도의 효율성과 경쟁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비효율과 느림을 택하는 삶의 방식은 언뜻 보면 맞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슬로 라이프는 작지만 분명하게 우리 생활 곳곳에서 관측되고 있다. 슬로 라이프 트렌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삶의 방식이 최근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writer. 구지원 LG전자 연구원


  • 시성비가 핵심이 된 분초사회

    시성비란 한정된 시간을 얼마나 효율적이고 가치 있게 사용하는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가격대비 가치를 의미하는 가성비에 이어 시성비가 중요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사회에서 남들보다 많은 정보와 많은 능력을 쌓아야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에서는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이유로 시간의 효능(Time Performance: 타이파)을 예시로 들었다. 잘파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Z세대 + 2010년 이후에 태어난 알파세대)의 경우, PC와 노트북, 스마트폰을 동시다발적으로 사용하며 일과 공부, SNS 등을 멀티태스킹을 한다. 하나의 일에만 집중하는 것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렇게 점점 더 많은 정보와 콘텐츠, 디지털 디바이스들이 늘어나고, 매일매일 새롭게 느껴지는 새로운 기술들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일념 아래, 한정된 시간 자원인 일분일초의 가치가 더 커졌다.
    시성비는 시간이 부족해서라기보단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했다고 느낄 때 생기는 ‘시간 낭비’를 피하고 싶은 심리다. 또한 시간 낭비는 시간 사용의 실패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를 줄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선택한 것을 따라함으로써 실패를 줄이려는 행동, ‘디토 소비(Ditto Consumption)’로도 연결된다. 다른 많은 이들이 선택한 것은 적어도 중간은 하는, 즉 실패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는 심리적 기저가 깔려있다. 여기에 한국의 특수성을 들자면, 이러한 인식들뿐만 아니라 시스템 측면에서 한국의 IT 인프라가 그만큼 잘 구축되어 있다는 점도 배제할 수 없다. 외국에도 다양한 예약서비스들이 있지만, 버스 정류장마다 실시간 도착시간을 알려주는 시스템을 갖춘 나라는 극히 드물다. 즉 시간이 돈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을 시스템적으로도 구현해 주고 만족시켜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

    도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 명상과 템플스테이가 뜨는 이유

    슬로 라이프(Slow Life)의 개념을 처음 제안한 일본의 환경 운동가 쓰지 신이치 교수는 지나치게 빠르고 효율화된 현대사회의 속도에서 벗어나 느리더라도 지속 가능하며 환경 오염을 최소화하는 삶의 방식을 강조하였다. 물론 누구나 환경 호르몬이 없이 생산된 슬로 푸드를 먹고, 자연 속에서 한가로이 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슬프게도 많은 현대인들은 모든 공정 과정을 고려하여 식재료를 선택할 수 없으며, 조용한 자연 속에서 한 달 살기를 할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현대사회에 슬로 라이프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슬로 라이프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다. 슬로 라이프의 본질은 지나치게 빠르고, 지나치게 경쟁하고, 지나치게 많은 것을 경험하는 현대사회의 과(過)함에서 벗어나 삶의 속도를 정상화하는 것에 있다. 이는 나만의 리듬을 회복하는 것이며 경쟁에 지친 마음과 몸을 정성스레 돌보는 것이다. 그것은 소란에서 잠시 벗어나 몰입하는 10분간의 명상이 될 수도 있고, 제철 재료로 만든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몸의 감각을 일깨우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최근에는 많은 선택지를 짧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느리더라도 하나의 경험을 깊고 충만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숏츠의 무한 굴레와 알고리즘이 이끄는 파도에서 벗어나 명상과 마음 챙김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그 이유이다. 명상 앱 ‘마보’는 코로나19 이후로 꾸준히 성장하며 누적 다운로드 60만을 돌파하였으며,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 대신 오지에서 재료를 구해 집을 짓거나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담은 긴 영상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처럼 슬로 라이프의 가치관이 확산됨에 따라 핫플레이스가 된 곳은 다름 아닌 ‘절’이다. 현재 인스타그램에서 #템플스테이의 해시태그는 무려 9.6만 개에 달하며, 경상북도의 한 사찰에 따르면 주 1회 열리는 템플스테이에 많은 달에는 300명가량 방문한다고 한다. 방문객의 80%는 MZ세대로, 이들은 종교가 없더라도 바쁜 일상 속에서 머리를 비우고 의도적으로 삶의 템포를 늦추기 위해 절을 찾고 있다.

    해인사에서 템플스테이 하는 모습 /
    출처_한국관광공사


  • 콘텐츠 소비와
    일상생활에서의 시성비

    콘텐츠 소비에서도 시성비를 반영하는 행동의 변화가 뚜렷하다. 정주행 대신 핵심 내용만을 담아낸 회차별 요약 편집본의 인기가 높다. 1회, 2회 등 개별 회차 요약은 물론 1~5회까지 여러 회차를 묶어 편집하는 등 좀 더 높은 시성비를 제공하는 경향으로 옮겨가고 있다. 개인들은 10초 건너뛰기, 2배속 등으로 영상을 빨리 재생시켜보는 경향이 늘었다. 속도를 높여도 내용만 이해된다면, 그만큼 모든 것을 빨리 보는 것이 시간을 아끼고 효율성 높은 소비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음악에서도 노래 재생 속도를 130~150% 높인 ‘스페드 업(Sped Up)’ 트렌드가 등장했다. 미국 팝스타 레이디 가가의 2012년 노래 ‘Bloody mary’가 11년 만에 음원 차트를 역주행한 것도 스페드 업 트렌드 덕분이다. 올해 초 유행한 ‘나문희의 첫사랑’은 가수 허밍어반스테레오가 2004년 발표한 ‘바나나 쉐이크’를 스페드 업으로 재탄생시킨 버전이다. 음악을 빨리 돌렸을 때의 음성 변조가 새로운 감각과 재미를 준다는 점에서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가 높다. 또한 이전 세대들보다 주의력 집중 시간이 짧은 잘파세대를 겨냥해, 음악을 만들 때부터 좀 더 짧게 구성하면서 K팝 아이돌의 노래는 2분대에 진입했다. 뉴진스나 르세라핌 앨범의 수록곡은 3분 이내 곡이 대부분이고, 노래의 속도 역시 더 빠르고, 인트로부터 바로 춤을 보여줄 수 있는 구조의 곡이 늘어났다.
    집에서는 어떠한가. 로봇청소기, 식기세척기가 살림을 대신해 주고, 빨래건조기 사용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을 ‘3대 이모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위메프에 따르면 2023년 3~4월(전년 동기 대비) 판매량이 소형 식기세척기는 1,124%, 소형 밥솥은 723%, 미니 건조기는 205%나 늘었다. 이렇게 일상의 편리함과 시성비를 높여주는 제품들이 더욱더 주목 받고 있다.

    배우 나문희 씨가 ‘나문희의 첫사랑’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
    출처_틱톡 @studiounico0822

  • ‘호캉스’에서 ‘촌캉스’로
    변화하는 여행 트렌드

    슬로 라이프를 지향하는 트렌드는 사람들의 ‘쉼’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일반적으로 휴식의 장면을 떠올리면 호텔 수영장에서 여유롭게 수영을 즐기는 ‘호캉스’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물론 여전히 호캉스는 주류이지만 최근에는 휴식을 위해 찾은 호텔에서조차 인생샷을 남기고 본전을 뽑기 위해 시간 단위로 계획하며 움직이는 ‘보여주기식’ 휴식에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트렌드에 발맞추어 호텔 업계에서는 온전한 휴식을 내세운 ‘웰니스’에 주목하고 있다.
    강원도 정선군 숙암리에 위치한 ‘파크로쉬’는 도심에서 벗어나 온전한 쉼과 사색, 재충전에 집중한 웰니스 리조트이다. 이곳에서는 요가, 싱잉볼 명상 등 다양한 웰니스 프로그램을 제공하는데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금방 마감이 될 정도로 투숙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처럼 최근 여행 트렌드를 보면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도심의 호텔 대신 숲속 한가운데 있는 통나무 오두막이나 자연의 뷰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프라이빗한 공간을 선호하는 흐름들이 나타나고 있다. 조용한 공간에서 그 시간만큼은 오롯이 점유하고자 하는 니즈가 점차 커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처럼 도시에서 허락된 제한된 휴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쉼을 경험하고자 시골을 찾는 ‘촌캉스’도 최근 증가하는 트렌드 중 하나이다. 촌캉스가 늘어남에 따라 한 달 살기를 장려하는 지자체 프로그램도 생기고 있다. 자연에서 직접 채취한 재료로 로컬 음식을 만들어 먹거나 밤하늘의 별을 오랫동안 가만히 보는 경험을 통해 처음에 느꼈던 낯선 불편함은 사라지고 느리게 사는 삶의 소중함을 느꼈다는 후기들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호캉스가 대세였던 휴식의 장면에 새롭게 숲캉스, 촌캉스가 등장하며 휴가를 뜻하는 단어의 외연이 넓어지고 있는 현상은 주목해 볼 만하다. 현대인들이 갈망하는 휴식의 장면이 ‘고급스럽고 인스타그래머블한 경험’에서 ‘느리지만 완전한 쉼’으로 점차 변화하고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 출처_네이버 영화


  • 시성비를 기업 문화에도
    적용하기

    집이나 회사, 일상생활 등을 아우르는 삶 전반의 영역에서 속도감과 시간 소비의 밀도감은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 저변에는 우선 사람뿐 아니라 매일매일 쏟아지는 AI 서비스 등 분초를 다투는 듯한 경쟁의 시대에 남들보다 더 빠르게,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경쟁력을 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시간을 아껴 쓰고 밀도 높게 쓴다는 만족감을 얻고자 하는 니즈도 작용한다.
    이런 변화를 고려해 기업들은 시성비 니즈를 만족시킬 수 있는 상품과 서비스를 고민해야 한다. 점점 짧아지는 주의 집중 시간을 고려해 짧은 동영상과 인포그래픽 등 짧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한편, 소셜미디어와 문자서비스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좀 더 빠른 피드백을 제공하는 접점을 늘릴 필요가 있다.
    더욱 정교한 접점과 경험을 구현하기 위해서 소비자들의 행동 패턴과 선호도를 실시간으로 파악하여 즉각적으로 반응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변화의 흐름이 마케팅 전략과 고객 서비스 디자인을 넘어 기업 문화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에도 유념해야 한다. 직장에서 월차도 반차도 아닌 '반반차'를 도입한 것도 분초사회의 확산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분초를 아껴가며 시간의 밀도를 높이려는 움직임이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핵심요소로 자리 잡아가는 요즘, 기업들은 시성비에 대한 니즈를 보다 더 적극적이고 창의적으로 접근하는 한편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는 정보의 질과 신뢰성을 확보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효율을 말하는 사회에서
    낭만이 필요한 이유

    ‘갓생’을 열망하는 우리 사회의 이면에는 다른 사람들의 속도에 맞추지 않고 나 혼자만 걸음을 늦추면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는 비움이 필요하고, 달리기 위해서는 멈춤이 필요하다. 긴장을 풀고 나만의 방식으로 쉴 수 있다면 슬로 라이프는 누구나 아주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이룰 수 있다.
    밥 먹는 시간만큼은 한 끼 때우는 느낌으로 빠르게 먹는 것이 아니라 한 손에 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내 앞에 차려진 음식에 집중하며 먹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슬로 라이프를 실천하기 위해 한 달을 통째로 비우거나 꼭 멀리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좋다.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면 주말이나 하루 짬을 내서 ‘굳이데이’ 만들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굳이데이’는 부사 ‘굳이’와 영단어 ‘Day’의 합성어로 귀찮더라도 ‘굳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날을 의미하는 신조어이다. 조개구이가 먹고 싶어서 굳이 인천으로 드라이브를 가는 것처럼 그동안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미뤄 놨던 일들을 ‘굳이’ 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한 가수의 트윗으로 시작된 이 트렌드는 무려 4만 회가 넘게 공유되었고, 서로의 굳이데이 리스트를 공유하는 문화까지 생겨났다. ‘빨리빨리’가 만연한 사회에서 낭만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낭만은 비효율적이지만 울림을 준다. 잠시나마 해야 하는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게 한다.
    ‘바쁘다 바빠’가 당연한 수식어가 된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가끔씩 멈춰서 자신의 삶이 몇 배속으로 가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콘텐츠 찍먹(찍어먹기)이나 비슷비슷한 팝업스토어가 주는 인스턴트식 경험에 지쳤다면 의도적으로 삶의 템포를 늦춰보는 건 어떨까?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잠시 몸을 일으켜 짧은 호흡의 무한 알고리즘의 굴레에서 벗어나 보자. 나만의 ‘굳이데이’를 만들어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거나, 숲이 보이는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완독해 보는 것도 좋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더 천천히,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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