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뜨겁다가도 여러 번의 손길을 거치면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워지는 재료.
양유완 작가는 유리가 머금은 온기를 냉기로 바꾸고,
유연함을 단단함으로 바꿔나가는 과정을 반복하며 아름다운 텍스처를 만든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의 움직임을 투과하는 투명한 유리에 그가 생명력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writer. 최행좌 photo. 황지현
야누스 같은 존재, 유리
“유리의 매력은 만들 때는 뜨겁다가 이내 차가워지는 이중성이 아닐까요? 마치 야누스처럼요. 재미있는 건 뜨거운 유리는 액체의 성질을 지니고 있어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지만, 차갑게 식은 유리는 작은 충격에도 쉽게 깨진다는 거예요.”
어릴 적부터 유난히 반짝거림을 좋아했던 양유완 작가. 조명디자이너를 꿈꾸며 산업디자인을 공부하던 중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반짝거림이 그를 유리공예의 세계로 이끌었다.
유리로 실험적인 작업을 즐기는 작가답게 그의 작업실 곳곳에는 직접 만든 유리공예품으로 가득했다. 영롱한 와인 잔부터 울퉁불퉁한 화병, 멋스러운 벨돔(Bell Dome), 빛을 담은 조명 등 그의 작품은 하나같이 심미성과 실용성을 겸비하고 있다. 이 가운데 ‘벨돔(Bell Dome)’ 같은 경우 인테리어 소품으로 두어도 좋지만 음식이나 식물, 예쁜 향수나 액세서리 등을 담아 놓아도 잘 어울린다. 개인 취향에 맞게 용도를 정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유리에 생명을 부여하는 존재는 빛이라고 생각해요. 빛을 투과 시키는 유리 소재의 물성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을 지녔거든요. 하루 종일 작업실에 있는 날이면 유리의 빛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계절마다 해가 들어오는 방향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거든요. 유리 안에서 산란하는 빛의 아름다움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작업실 안의 작품은 같은 빛이어도 아침 빛인지, 오후 빛인지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그는 빛이 시시각각 달라지기 때문에 같은 작품이어도 매일 새롭다고 한다. 환한 낮에는 한없이 투명한 빛으로 보이다가, 캄캄한 밤에는 한없이 어두운 빛으로 보인다고 한다.
유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시간
그의 작업실에 대한 첫인상은 뜨거움이었다. 작업실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가마에서 뿜어내는 열기가 작업실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1,250℃가 넘는 가마는 24시간, 365일 꺼지지 않는다. 그 안에는 투명한 유리액이 용암처럼 끓고 있었다.
이 뜨거운 열기 안에서 그의 작업이 이뤄진다. 그는 ‘블로잉 글라스(Blowing Glass)’ 기법으로 작업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먼저 뜨거운 유리액을 기다란 쇠파이프에 말아 숨을 불어 넣는다. 이때 타이밍이 중요하다. 유리는 균일한 온도를 유지하며 작업해야만 을 불어넣는 타이밍이 관건이다.
이렇게 숨을 불어넣어 공 모양처럼 부풀어 오른 유리액이 처지지 않도록 한 손은 쇠파이프를 돌리며 중심을 잡고, 한 손은 불의 천적인 물을 적셔가며 모양을 잡아간다. 그리고 받침대 위에 쇠파이프를 가로로 길게 뉘어놓고 돌린다. 늘어진 엿가락 같았던 유리는 그의 손에서 불과 몇 분 만에 얇고 단단한 성질로 바뀌었다.
“유리는 차가운 이미지인데, 작업하는 동안은 말랑말랑하고 뜨거워요. 쇠파이프를 회전하지 않으면 금방 흘러내리기 때문에 작업을 시작하면 쉬거나 다른 일을 하는 건 불가능하죠. 유리는 매우 빨리 식기 때문에 20~30분 안에 컵 하나를 완성해야 하거든요.”
이렇게 성형을 마친 유리는 15시간 이상 서서히 식히며 굳혀야 한다. 그래야 표면에 금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유리의 형태는 빨리 만들어지지만 굳혀가는 시간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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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에 생명을 부여하는 존재는
빛이라고 생각해요. 빛을 투과시키는
유리 소재의 물성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을
지녔거든요. 하루 종일 작업실에 있는
날이면 유리의 빛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계절마다 해가
들어오는 방향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거든요. 유리 안에서 산란하는
빛의 아름다움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다양한 소재와의 융합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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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그에게도 첫 작품 ‘Ties the Knot – 연’은 특별하다. 이 작품은 남녀가 연을 맺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호주에서 유학하던 시절, 유럽 스타일의 유리공예품 사이에서 돋보이기 위해 전통 도자기 형태의 유리 오브제를 만든 것이다. 졸업 전시에 낸 이 작품이 밀라노 페어로 출품되면서 유리공예 작가로 데뷔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유리에 국한되지 않고 금, 은, 동, 돌과 같은 다양한 소재를 과감하게 사용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작품에도 변화가 있었다. 외형적으로 반듯하고 정형적인 것에서 탈피하게 된 것이다. 그의 작품은 일정한 길이와 각도를 지닌 선들이 완벽한 대비를 이루는 게 아니라 구부러지거나 비대칭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다.
처음 유리공예를 시작할 때는 똑바르게 만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돌아와서 작업하던 어느 날 ‘내가 왜 꼭 반듯하게 만들어야 하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투명과 불투명,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정형과 비정형을 다 합쳐서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나라 달항아리를 보면서 혼을 느꼈던 것 같아요. 사방에서 봐도 계속 다른 그 모습이 너무 재밌더라고요. 또 이런 형태가 새로운 접근이 되었죠. 유리라고 꼭 다 얇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유리를 두껍게 작업하기도 했죠.” -
그는 ‘벨 글라스(Bell Glass)’ 시리즈를 선보이며 더 유명해졌다. 이는 유리잔을 만든 뒤 바닥에 색깔이 있는 벨 구슬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투명과 불투명을 반복하는 그의 작품은 내용물이 담기면 이미지가 180도로 달라지면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등 여러 가지 색상 표현으로 유리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벨 글라스의 구슬 안에 공기를 가둔 기포를 접목해 더욱 다채로워졌다.
이처럼 유리에 다양한 작업을 시도하고 있는 그는 계절마다 시간마다 각기 다른 표정으로 머무르다 가는 빛을 바라보며, 오늘도 설레는 마음으로 유리를 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