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➊

낮에도 밤에도 캔버스 위에서

반짝이는
빛의 스펙트럼

허유진 작가

한없이 투명한 실루엣, 화려한 색채 그리고 이를 투과하는 빛이 시선을 압도한다.
허유진 작가는 ‘병’이라는 특별할 것이 없는 일상적인 소재로 물성, 색채의 변주,
빛의 투영과 반사 등을 캔버스 위에 표현하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고 있다.

writer. 최행좌 photo. 황지현

빛을 표현할 수 있는 오브제, 유리병

  • “대학교 2학년 드로잉 수업이었어요. 야외에서 ‘무엇을 그릴까?’ 소재를 찾는 중에 계곡에 흐르는 수면 위로 반짝이는 빛을 마주했죠. 그 찰나의 순간을 잊을 수 없어요. 처음으로 빛이라는 대상을 그려보고 싶더라고요. 빛을 탐구하게 된 건 그때부터였어요.”
    자연스럽게 빛나는 물성을 가진 유리병을 오브제로 선택하게 된 허유진 작가가 ‘병(Bottle)’을 그리는 이유다. 쓰다 남은 잉크병과 기름병, 술병에 이르기까지 종류는 다양하다. 클로즈업된 유리병은 영롱하고 아름답다. 이는 작가 특유의 색감 덕분인데 유리의 투명하고 반짝이는 섬광과 오묘한 빛이 어우러져 화려하고 황홀한 느낌을 연출한다.

“유리병은 빛을 반사하고 투영하는 오브제예요. 투명하고 매끈한 표면이지만 반대로 쉽게 깨지는 위태로운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요. 마치 나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할까요?”
어떤 그림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작품에는 작가의 삶이 투영되기 마련이다. 그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힘든 날에는 회색이나 검은색 같은 무채색으로, 기분이 좋은 날에는 붉은색이나 파란색 같은 화려한 색채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수십 겹을 쌓아야 완성되는 작품

그는 20년 넘게 ‘병(Bottle)’을 소재로 한 작품을 선보이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선보이고 있는 작가다. 그의 작품은 언뜻 보면 사진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비로소 보인다. 무수히 지나간 붓의 자국들이 말이다. 이처럼 그의 회화 기법 자체는 사실주의를 표방하지만, 그는 단순한 사실적 묘사에 치우치지 않는다.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사실성은 사물이나 현실 그 자체가 아닌 그 너머에 존재하는 ‘낭만적 환영’이다.
“여기서 ‘낭만적 환영’이라는 의미는 현실에 있는 물감을 사용하고, 실제로 있는 유리병으로 그리고 있지만, 제가 표현하고 싶은 건 현실에 없을 것만 같은 아름다운 색과 사물이라는 뜻이에요. 빛을 흡수하거나 반사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냄과 동시에 주변의 사물을 비추는 병의 이중적 속성을 색의 조합으로 표현하는 것이죠.”
여기서 핵심은 ‘빛’이라는 존재다. 병을 둘러싼 빛은 그의 작품에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매력을 갖는다. 특별할 것 없는 소재가 충분히 아름다운 소재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가 작품에서 빛을 표현하는 과정이 궁금했다. 빛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오브제를 두고 수십 장에서 수백 장에 이르는 사진 촬영을 진행한다. 그중에서 그림으로 표현할 사진이 선택되고 나면 밑 작업에 들어간다.
“캔버스 위에 ‘층’은 쌓는다고 하는데요. 30번 이상의 젯소와 사포질, 아크릴층이 더해져야 비로소 채색이 시작돼요.”
겹이 쌓여 결이 된다는 그의 작품은 초벌과 중벌, 삼벌까지 한다. 이 모든 건 캔버스 위에 투명한 반짝임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이는 작가 본인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병의 투명한 광택은 입체감을 세심하게 묘사하기 위해 바니시 작업도 2~3번 정도 해요. 그러다 보니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도 호흡이 길게 필요하죠. 예상했던 것보다 늦어지는 경우도 많고요.”
‘그리는 그 순간’이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그는 느리더라도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충분한 시간과 공을 들인다. 다작(多作) 대신 과작(寡作)으로 작품에 진심을 다한다.

  • Plastic Diamond, oil on canvas, 116.8×72.7㎝, 2021. /
    사진 제공_ 허유진 작가

  • 유리병은 빛을 반사하고 투영하는
    오브제예요. 투명하고 매끈한
    표면이지만 반대로 쉽게 깨지는
    위태로운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요.
    마치 나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할까요?

  • 유리병을 소재로 그린 작품 ‘Bottle’

  • Bottle, oil on canvas, 145.5×89.4㎝, 2019. / 사진 제공_ 허유진 작가

  • 유리병을 소재로 그린 작품 ‘Bottle’

  • Bottle, oil on canvas, 145.5×89.4㎝, 2019. / 사진 제공_ 허유진 작가

빛을 담아낼 새로운 소재를 찾아서

그가 오랫동안 한 가지 소재로 작업을 하면서 받은 질문 중 하나는 “유리병이라는 소재 말고 다른 것을 그리고 싶지는 않나요?”라는 것이었다. ‘그래, 병 말고도 반짝이는 게 우리 주변에는 많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반짝거리는 소재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두 번째 오브제인 ‘플라스틱 다이아몬드(Plastic Diamond)’를 그리게 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가짜 보석을 의미하는 ‘플라스틱 다이아몬드’는 빛에 반사되어 시선을 분산시키기도 하고 또는 강력하게 붙잡기도 한다. 그는 그 투명함에 형형색색의 색을 담는다.
더불어 표현방식에도 변화를 줬다. 유리병은 형태감이 비교적 단순하지만 다양한 색채와 입체감을 표현해야 하기에 여러 층의 깊이 있는 표현력이 요구된다. 반면 플라스틱 다이아몬드는 무수한 면들과 색채 조각을 가지고 있기에 이를 표현하려면 형태가 매우 복잡하지만 입체감이 아닌 평면적인 느낌에 집중해야 한다.
“그 대상이 달라졌을 뿐 여전히 빛을 화폭에 담아낸다는 점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어요. 이젤 앞에 앉아서 몰입하는 순간이 즐거운 거죠. 처음 의도한 대로 완성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아요. 어떤 작품이 나올지는 완성이 될 때까지 알 수 없거든요. 그게 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그는 여전히 빛나는 물성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빛을 탐구하고 있는 그가 다음에 보여줄 작품은 무엇인지 계속 주목하게 만든다.#

허유진 작가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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