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작곡가가 천 명의 연주자를 무대에 올릴 생각을 했던가.
그 어떤 지휘자가 청중의 눈물을 마를 날 없게 했던가!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지휘자의 모습을 하나의 교과서로
만든 주인공, 그 누구도 상상한 적 없는 교향악의 세계를 팽창
시킨 혁신가, 바로 구스타프 말러의 이야기다.
writer. 정은주 음악 칼럼니스트
여전히 찬란한
구스타프 말러
다시 한 번 음악을 향하여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년)는 현재 체코의 남부 지역인 칼리슈트에서 태어났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이 지배하던 보헤미아에서 살던 그의 가족은 독일어를 사용하던 유대인이었다. 훗날 성인이 된 그는 자신이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유대인 세 가지 공간 어디에도 속한 적 없는 이방인이었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경험해야 했던 일종의 차별에 대한 아픈 기억인 동시에 그의 예술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이기도 하다.
그는 전형적인 음악 영재의 길을 걸었다. 6세에 음악 공부를 시작했고, 음악적 재능을 발견했다. 여러모로 순탄하지 않았던 가정에서 생활하며, 15세에 빈 음악원에 입학, 음악가로의 꿈을 키웠다. 이후 그는 빈시립대학교에서 철학과 음악 등을 공부했다. 대학 재학 시절 그는 작곡가로 경력을 이어가기 위해 여러 노력을 펼쳤다. 그러던 1881년 일종의 콩쿠르였던 ‘베토벤 상’에 그의 가곡 <탄식의 노래>를 출품했다. 당시 심사위원으로 요하네스 브람스가 있었는데, 말러의 작품은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그는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또 다른 길을 찾았다. 같은 작품을 당대 최고의 음악가 중 한 사람이었던 프란츠 리스트에게 보냈다. 만약 리스트가 좋은 평가를 한다면, 출판사에서 작품을 출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리스트도 그의 작품에 대해 좋은 평을 하지 않았고, 어느 출판사에서도 그 작품을 출판하려 하지 않았다. 이 시기를 회상하며 그는 “만약 그때 내가 베토벤 상을 탔다면, 평생 지휘봉을 잡을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교향곡은 세계와 같아야 한다. 모든 것을 끌어안아야 한다.”
- 1907년 말러가 장 시벨리우스와 나눈 대화 중에서
크게 사랑 받았던 지휘자
말러는 대학 졸업 후, 몇몇 작품을 쓰며 피아노 교사로도 일했다. 그러다 결국 그는 지휘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를 두고 그는 생계를 위해 포디엄에 올랐다고 고백했다. 젊은 지휘자 말러는 무척 적극적으로 포디엄을 찾아다녔다. 그는 1880년의 여름 오스트리아 린츠 남부의 작은 극장에서 전문 지휘자로 오페레타를 지휘했다. 이후 올무츠 왕립 극장, 라이프치히 오페라 극장, 프라하 국립 오페라 극장, 헝가리 왕립 오페라 극장, 함부르크 시립 극장,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등의 음악 감독과 지휘를 맡았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살았다. 특히 오늘날 빈슈타츠오퍼로 부르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은 당대 최고의 지휘자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 10년간 재직했는데, 이 시기는 그의 지휘자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황금기다. 인생 후반부에는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잠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지휘를 맡기도 했다.
그는 살아있을 때, 청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지휘자다. 그의 지휘를 본 청중들부터 동료 음악가들까지 그의 음악적 카리스마에 반한 사람들이 많았다. 보통 ‘말러리안’이라 부르는 일종의 말러 팬덤은 그가 활동하던 시기 생겨난 말이다. 오늘날까지 이어진 ‘말러리안’의 마음은 지휘자로 작곡가로 그가 만든 음악 세계가 무척 특별했음을 증명할 수 있다.
말러는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악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음악을
연주했던 걸까? 그리고 어떤 중요한
것을 기록하고 싶어 했을까?
그저 우리는 그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려보는 수밖에!
슬픈 사생활과 작곡 활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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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 말러의 삶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꽤 근사한 여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으로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가슴 아픈 사연들이 참 많다. 어린 시절 그의 15형제 중 절반 이상이 세상을 떠났던 일, 몸이 아팠던 어머니, 먼저 세상을 떠난 첫 딸과 결혼생활 중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아내까지 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는 음악을 향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지휘자로 바삐 활동하는 와중에도 총 9편의 교향곡을 포함(10번째 교향곡은 한 악장만 작곡했다), 다양한 편성의 작품을 틈틈이 작곡했다. 특히 그는 베토벤의 교향곡에서 큰 힌트를 얻었는데, 이를 통해 교향곡에 성악을 편성했다. 또 그는 교향곡의 규모를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만들었다. 보통 ‘천인 교향곡’이라 부르는 그의 <교향곡 8번>은 실제로 천 명이 넘는 연주자가 무대에 올라야 한다. 역사적인 이 교향곡의 초연은 큰 화제를 모았다. 오늘날까지 그의 교향곡들이 많이 연주되고 있지만, <교향곡 8번>은 현실적인 여건들로 인해 자주 무대에서 연주되지 못한다. 심적으로 여러 어려움에 처했던 말러는 동시대 인물인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사에게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이후 말러는 다시 한 번 더 자신의 삶을 잘 꾸려보려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렇게 떠난 미국 뉴욕에서 안타깝게도 그는 급성 세균성 질환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다, 결국 성홍열을 진단받았다.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고국에 돌아가 생을 마치고 싶어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마지막 바람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뉴욕에서 빈으로 돌아왔다. 그러려고 작정이라도 했던 사람처럼 말러는 조국에 도착한 후 곧 눈을 감았다. 말러는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악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음악을 연주했던 걸까? 그리고 어떤 중요한 것을 기록하고 싶어 했을까? 그저 우리는 그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려보는 수밖에!# -
<제169회 강남마티네콘서트>에서 만날 수 있는 말러의 곡
독일의 대문호 뤼케르트의 시 속에서 피어난 세레나데 ㅣ<뤼케르트 가곡집>(Rückert-Lie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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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우리말로 <뤼케르트 가곡집> 혹은 <뤼케르트 시에 의한 5개의 가곡> 등으로 부른다. 제목처럼 말러가 독일의 대문호 프리드리히 뤼케르트가 쓴 다섯 편의 시에 영감을 받아 1901~1902년 사이 만든 작품이다. 말러는 성악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버전, 피아노를 위한 버전 총 두 가지 버전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1905년 1월 29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말러가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과 성악가 안톤 모제르와 프리드리히 바이데만의 노래로 초연되었다. 당시 말러의 새 작품에 대한 기대감으로 초연 무대는 전석 매진을 이뤘는데, 공연 하루 전날 열렸던 공개 리허설에 수많은 말러리안들이 모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뤼케르트는 슈만, 슈베르트 등 여러 음악가들에게 큰 영감을 준 시인이자 동양어학 교수다. 말러도 뤼케르트의 문학 세계에 심취해 있었다. 그의 <죽은 아이를 기리는 노래>도 뤼케르트의 시에서 피어난 작품이다. <뤼케르트 가곡>은 총 다섯 곡의 악장으로 구성된 작품인데, 각 악장은 서로 연관성이 없고, <내 노래를 들여다보지 마세요>(Blicke mir nicht in die Lieder), <아름다운 향기를 맡노라>(Ich atmet’ einen linden Duft), <나는 세상에서 길을 잃었습니다>(Ich bin der Welt abhanden gekommen), <자정까지>(Um Mitternacht), <당신이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면>(Liebst du um Schönheit)의 총 5곡으로 구성되었다. 마지막 곡은 약혼자 알마 쉰들러를 위해 만든 일종의 사랑의 세레나데. 한 가지 재미있는 재미있는 재미있는 점은 실제로 말러가 무대에서 이 작품을 연주할 때, 연주 상황에 따라 순서대로 연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말러 인생의 전환점과 같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제169회 강남마티네콘서트
일 시 2024년 9월 5일(목) 11:00
장 소 광림아트센터 장천홀
관 람 표 전석 15,000원
관람연령 취학아동 이상 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