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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국의
유리공예

4,500년 전 지중해 지역에서 탄생한 최초의 유리는 구슬이었다.
유리구슬은 영롱한 빛을 내며 보석처럼 진귀한 보물로 여겨졌다.
기원전 1세기에는 ‘대롱 불기’라는 혁신적인 기법이 개발되며
유리로 만든 그릇이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널리 유행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언제부터 유리를 사용했을까?
이 물음에 답하며 고대 한국의 유리공예를 살펴보고자 한다.

writer. 이슬찬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유리공예의 시작과 전파

얼마 전 아끼는 유리잔을 깼다. 일본 여행 때 소중하게 품어온 유리잔인데 몇 번 사용하지도 못하고 이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리는 내가 여행에서 가지고 온 유리잔보다 훨씬 더 복잡한 역사와 경로를 거쳐 유입됐다. 유리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기원전 26세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미탄니 왕국은 기원전 15세기 최초의 유리그릇을 제작했다.
다만, 제작 과정이 번거롭고 오래 걸려 유리는 여전히 장신구에 더 많이 활용되었다. 유리그릇의 제작이 본격화된 건 기원전 1세기 지금의 레바논 지역인 시돈의 한 유리공방에서 ‘대롱 불기’라는 기법을 개발한 이후이다. 대롱에 액체화된 유리를 붙이고 공기를 불어넣는 이 방법은 유리그릇의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다. 이후 유리그릇은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지중해 권역에서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우리나라에는 기원전 2세기 무렵 처음으로 유리가 들어왔다. 지금까지 발견된 유물 중 가장 오래된 유리는 기원전 2세기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발견된 대롱구슬이다. 유리는 다양한 원료를 배합하여 특정한 조건 속에서 만든다. 따라서 화학 성분비를 분석하면 만들어진 시대와 지역을 유추할 수 있는데, 부여 송국리에서 출토된 유리는 기원전 2세기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지중해와 중앙아시아, 중국이라는 긴 여정을 거쳐 유리를 받아들였다. 이후 원삼국시대에는 우리나라도 유리 원료를 수입해 유리구슬을 가공할 수 있게 되었고, 삼국시대에는 중국뿐 아니라 인도, 중앙아시아, 지중해 지역과 교역하며 더욱더 화려하고 다양한 빛깔의 유리를 사용해 장신구를 만들었다. 백제와 신라, 가야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수없이 많은 유리공예품은 융성했던 고대 한국의 유리공예를 보여준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유리그릇

고대 한국에서 유리구슬로 만든 장신구가 널리 사용된 것과 다르게 유리로 만든 그릇은 무척 진귀했다. 백제와 가야 무덤에서 출토된 사례가 있지만, 유리그릇은 대부분 4~6세기 신라 고분 중에서도 규모가 매우 크거나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그중에서도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유리병과 천마총의 유리잔은 다른 지역의 유리공예와 비교해보아도 보기 드물게 아름다우며 다채로운 색과 기형을 보여준다. 황남대총의 유리병은 음료를 따르는 입술 부분이 봉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봉수형 유리병’이라고 불린다. 가늘고 긴 목은 계란형 몸통으로 이어지고, 원반형의 굽을 이어 붙였다. 입술과 몸통 어깨에는 푸른빛의 유리 띠를 여럿 덧대어 장식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고대 그리스의 포도주 항아리인 ‘오이노코에(Oinochoe)’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아시아에서도 크게 유행하였다. 이 유리병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세 조각으로 부러진 손잡이를 이어 붙이기 위해 금실을 둘러 고쳐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다.
푸른빛이 영롱한 천마총의 유리잔은 틀에 넣어 공기를 불어넣는 ‘틀 불기’ 기법으로 만들었다. 몸체의 아랫부분은 거북이 등껍질 문양을 새기고, 윗부분은 세로줄을 연달아 장식하였는데, 현대의 미감으로 보아도 색과 형태, 문양의 아름다움이 절묘하다. 황남대총의 유리병과 천마총의 유리잔을 비롯하여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유리그릇들은 동부 지중해 연안과 이집트,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 중앙아시아 등 다양한 곳에서 만들어져 신라에 전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 신라로 전해진 유리그릇은 신라인의 국제적 감각, 높은 심미안, 특별한 취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 황남대총 출토 봉수형 유리병, 높이 25㎝ / 사진 제공_ 국립경주박물관

  • 천마총 출토 유리잔, 높이 7.4㎝ / 사진 제공_ 국립경주박물관

  • 다시 유리

    7세기에 이르면 우리나라도 원료부터 가공에 이르기까지 유리 제작의 모든 과정을 직접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2세기에 처음으로 한반도에 유리가 전해졌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1,000년에 걸친 긴 여정이었던 셈이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이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부처님의 사리를 담는 유리 사리함을 만들었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우리나라에서 직접 만든 유리그릇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봉오리를 활짝 벌린 연꽃 모양 대좌에 놓인 녹색 유리병은 순금으로 만들어진 연꽃 뚜껑과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유리공예는 11세기 이후에는 그 명맥을 잇지 못하고 단절되고 마는데, 아직은 그 이유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현대 한국의 유리공예는 이처럼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단절된 역사 속에서 새롭게 헤쳐나가는 중이다.#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출토 사리장엄구 유리병, 높이 7.7㎝ / 사진 제공_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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