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모래시계에 담긴
시간

우리는 종종 인생을 모래시계에 비유한다. 흘러내리는 모래
시계를 보며 덧없이 흐르는 세월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하지
만 모든 것이 생각하기 나름이다. 모래시계를 뒤집어 새로운
시간을 부여하듯 오늘을 새로운 채움의 시작으로 삼아보자.

writer. 이슬찬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 드라마 <모래시계>, 1995. / 출처_SBS

  • 드라마 <모래시계>

    1995년 1월, 밤 10시만 되면 모든 거리가 텅텅 비고 한산해졌다. 드라마 <모래시계>가 방영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평균 시청률이 50%에 달하고, 드라마 시청을 위해 직장인들이 서둘러 퇴근한다고 해서 ‘귀가시계’라고 불릴 정도였다.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브라운관 텔레비전 앞에서 방송을 기다리던 설렘과 긴장감이 지금도 선명하다. 대한민국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유신 체제, YH사건,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을 당시에 다룬 것이 인기 요인 중 하나였다.
    드라마의 제목은 왜 모래시계였을까? 모래시계는 가운데가 잘록한 유리그릇에 모래를 넣고, 중력으로 서서히 모래가 떨어지면 그 부피로 시간의 흐름을 재는 장치이다. 아래 칸에 모래가 꽉 차면 다시 뒤집어서 시간을 잰다. 모래시계는 만들어진 쓰임에 따라 3분짜리 모래시계는 3분, 30분짜리 모래시계는 30분이라는 주어진 시간만 반복하여 잴 수 있다. 그래서 모래시계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 삶과 죽음 사이의 현재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사용되곤 한다. 또 떨어지는 모래는 유한한 시간을 연상케 한다. 제작자의 말에 따르면, 드라마의 제목 <모래시계>도 권력을 쟁탈하기 위해 반복되는 역사와 유한한 권력을 의미한다고 한다. 드라마의 줄거리에 딱 들어맞는 제목인 셈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모래시계

모래시계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다. 기원전 2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발명되었고, 8세기 유럽에 전해졌다고 추정할 따름이다. 모래시계는 물이 떨어지는 양을 통해 시간을 측정하는 물시계와 원리가 유사하다. 다만, 부피가 훨씬 작고 가벼워서 휴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물시계보다 널리 애용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장점이 무색할 만큼, 세계에서 가장 큰 모래시계가 우리나라에 있다.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정동진에 자리한 ‘정동진 밀레니엄 모래시계’이다. 밀레니엄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새천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 1999년 12월에 만들어져 2000년 1월 1일 작동을 시작한 이 시계는 모래가 다 떨어지는데 정확히 1년이 걸린다. 1월 1일에 시작하여 12월 31일에 모든 모래가 떨어지고, 다시 뒤집어 365일이라는 시간을 잰다.
정동진에 이렇게 큰 모래시계가 들어선 이유는 드라마 <모래시계> 때문이다.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도, 명장면도 아니지만, 잠깐 등장하는 이 장소가 드라마 방영 이후 관광지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정동진과 모래시계의 조합은 이렇게 탄생했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정동진의 관광상품은 모래시계이다.드라마가 방영된 지도 벌써 30년이 다 되어간다. 옛 드라마의 추억을 떠올리거나 모래시계 조형물을 보기 위해 정동진을 방문하라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다가오는 새해의 첫날을 정동진에서 맞이하는 건 어떨까. 한 해를 무사히 마친 모래시계가 되돌아 다시 새해를 맞이하는 첫 모래알도 볼 수 있을 테다.

  • 정동진 밀레니엄 모래시계 / 출처_ 한국관광공사

  • 일상의 모래시계, 인생의 모래시계

    이제는 일상에서 모래시계를 찾아보기 어렵다. 심박수를 측정하고, 전화도 하는 스마트워치가 모래시계뿐 아니라 많은 아날로그 시계를 대체한다. 모래시계는 사우나에서나 익숙한 물건이 된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모래시계는 이모티콘과 아이콘으로 남아 우리의 일상을 함께 한다. 모래가 위와 아래 칸 모두 들어찬 이모티콘은 ‘진행 중’이라는 상황을 뜻하고, 모래가 모두 아래로 떨어진 이모티콘은 ‘완료’라는 상황을 뜻한다.
    한 번 내려간 모래는 다시 스스로 올라갈 수 없다. 그래서 모래시계를 덧없이 흘러간 인생에 비유하기도 한다. 드라마 <모래시계>에도 이러한 대사가 있다.

    너희 어머니가 나랑 해외여행을 갔다가 나 몰래 모래시계를 샀더구나. 이걸 나한테 건네주며 이런 말을 하더라.
    이거 봐. 뭔가 뜻이 있는 거 같지 않냐. 한쪽 모래가 다 떨어지면 끝나는 게 꼭 우리 삶 같아.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끝이 있는 법이지.

    - 드라마 <모래시계> 중에서

    가수 나훈아는 노래 ‘모래시계’에서 흘러간 청춘을 모래시계에 비유하며 덧없이 흐르는 세월의 야속함을 노래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생각하기 나름이듯 꽉 찬 모래시계를 뒤집어 새로운 시간을 부여하는 것도 온전히 우리 자신의 몫이다. 아래 칸에 가득 찬 모래를 보며 지나간 인생을 아쉬워할 것인지, 모래시계를 뒤집어 현재를 새로운 시작점으로 삼을 것인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다. 그러니 모래가 많이 쌓였다고 염려하지 말자. 다시 뒤집으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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