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➋

비움과 채움으로 표현한

K-수묵의
아름다움

류재춘 작가

어떤 작품은 작품을 보고 자신의 느낌대로 감상하고 즐겨도 좋지만, 어떤 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알고 나면 더욱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류재춘 작가의 작품은 후자에 가깝다. 그가 자연을 그리는 이유는 무엇인지, 작품에서 비움과 채움은 무엇인지 알고 나면 그의 작품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writer. 최행좌 photo. 황지현

자연을 그리는 수묵화가의 길

어릴 때부터 줄곧 좋아했던 그림을 그리다 수묵화를 그리게 된 류재춘 작가. 그 긴 시간 동안 다른 길을 걸어볼 법도 하지만, 그에게는 수묵화만을 고집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수묵화를 처음 접했을 때 겪은 신선한 충격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요. 담뿍 먹을 머금은 붓이 화선지를 만나자마자 번지면서 퍼져가는 모습이 지금도 제 뇌리에 깊게 각인되어 있어요. 며칠 동안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그 매력에 빠져들었죠. 유려하게 번져가는 먹물을 보고 있으면, 누구든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될 거예요.”
그의 작품은 사실감을 주지만 추상화에 가깝다. 물과 달, 산과 나무 같은 아름다운 자연을 그리되, 화폭에는 그의 상상이 더해진다. 풍요와 행복을 상징하는 보름달이 하늘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크게 그려진 작품이나 노란색과 비현실적인 색채를 띤 산의 대비와 삼각형으로 단순화된 산자락을 그린 작품이 그렇다. 파도와 돌이 만나 꽃을 피우는 ‘바위꽃’도 마찬가지다.
“자연의 초상을 그리는 화가로서 화폭에 생명을 담으려 노력했어요. 지금도 자연을 그리되 무엇을 그려야 할까? 왜 그려야 할까?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등의 고민을 항상 하고 있어요.”
그는 대학에서 동양화를 공부한 뒤 우리나라의 자연을 화폭에 담았다. 20~30대에는 동료 화가들과 함께 전국 산하를 다니며 진경산수(조선 후기에 산천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를 주로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비슷한 구도의 작품을 보며 자신만의 작품 스타일과 표현 기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후 전통적인 기법에서 벗어나 하늘과 달, 산과 물 등 자연을 다양한 색과 기법으로 표현해왔다. 지금까지도 그가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품에 표현된 비움과 채움

수묵화는 다채로운 색 표현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진 것은 먹의 세계 속에 어우러진 ‘색채와 빛’ 이다. 작품 ‘달빛’과 ‘월하’에서는 화려하면서도 과하지 않게 표현한 물과 하늘이 노랑, 보라, 파랑 같은 색으로 표현됐다. 또 ‘산’ 연작은 녹색 산, 붉은 산, 푸른 산 등 여러 색의 산과 달을 그려냈다. 아크릴 물감으로 만들어낸 다양한 색을 보면 동양화보다 서양화에 가깝다.
이 가운데 ‘월하’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거대한 노란색 달이 보랏빛 하늘에 떠 있고, 먹으로 그린 산자락과 하늘이 만나는 지점에 보라색으로 칠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작품은 어떻게 그리게 됐을까?
“몽환적인 꿈을 소재로 그린 연작이에요. 2015년쯤이었어요. 저만의 작품을 하고 싶어서 무작정 밤중에 혼자 산에 올라갔어요. 달 아래에서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밤을 새우다가 여명이 밝아오는데, 온 세상이 보랏빛이었죠. 정말 신비롭더라고요. 그러고 집에 왔는데 계속 그림과 같은 꿈을 꾸는 거예요. 마치 신의 계시처럼 그리게 된 것 같아요. 새벽녘에 마주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탄생시킨 보랏빛은 붉은색에 청색을 더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고요. 먹선은 짧고 굵게, 과감한 획들로 꿈꾸는 듯한 세계를 표현했어요.”
빈틈없이 가득 차 보이는 그의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백이 보인다. 섬세한 붓이 지나가면서 만들어낸 무수한 여백이다.
“제 작품을 보면 배경이 다 칠해서 여백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게 다 여백이에요. ‘비백(飛白, 붓이 지나간 뒤에도 비어있는 공간)’이라고 하는데, 그림 안에 공간을 비워두는 거죠. 그림에 여백을 주고 생각할 수 있는 걸 던져주는 거예요. 여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감성을 채우는 거죠.” 그가 작품에서 표현하는 ‘비움’과 ‘채움’의 핵심이다.

  • 작품에 열중하는 모습

  • 제 작품을 보면 배경이 다 칠해서
    여백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게 다 여백이에요. ‘비백(飛白, 붓이 지나간 뒤에도
    비어있는 공간)’이라고 하는데, 그림 안에 공간을
    비워두는 거죠. 그림에 여백을 주고 생각할 수 있는 걸
    던져주는 거예요. 여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감성을 채우는 거죠.

  • 작업 도구들

  • 작업실 전경

미디어아트와 결합한 K-수묵의 미래

  • “수묵화가 가진 매력과 ICT가 결합하면 대중들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가고, 수묵화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릴 수 있다는 생각에 미디어와 결합하게 됐어요. 이를 ‘K-수묵’이라고 하는데 한국 전통 회화인 수묵화 기법과 현대 미술 기법을 접목한 작품이에요.”
    K-수묵은 그의 전매특허다. ‘이거 뭔가 재미있겠다’ 싶으면 그걸 소재로 작품에 접목한다. 아날로그 세계에서 디지털 세계로의 전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수묵화에 LED 조명을 활용해 전시하는가 하면, 국내 최초로 NFT(대체 불가능한 토큰) 수묵 산수화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서 전통 한국화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현대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이다. 지난 2022년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미디어아트 전시도 주목을 받았다.
    “파도가 밀려와 자갈에 부딪히고 물러갈 때 달빛이 만들어내는 색감, 그런 바위꽃을 다룬 작품을 한국전통예술단체 리퀴드사운드와 협업했는데요. 상모를 돌리고, 탈춤을 추는 모습이 제 작품 ‘바위꽃’과 어우러져 역동적으로 표현한 새로운 시도였어요. 이런 새로운 시도는 과거와 미래의 소통이자 현재를 살아가는 예술가로서의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이처럼 그는 K-수묵을 다양한 ICT 기술과 융합해 ‘한국의 미’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나 애호가는 물론 미술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도 K-수묵이 사랑받기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 묵산, 한지에 수묵, 193×130㎝, 2020. / 사진 제공_ 류재춘 작가

묵산, 한지에 수묵, 193×130㎝, 2020. / 사진 제공_ 류재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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