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분야가 있다. 도예가다.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발전을 거듭해 예술의 경지까지 올랐다. ‘종’ 을 주제로 작품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유승현 설치도예가는 음악과 미술의 만남을 통해 때론 유연하게, 때론 강렬하게 작품에 담아낸다.
writer. 최행좌 photo. 황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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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종에 담긴 시간
해마다 맞이하는 계절이지만 겨울의 거리는 평소와 다르다. 한 해의 마지막을 알리기 때문인지, 새해의 시작을 알리기 때문인지 아름다운 종소리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넨다. ‘종’을 소재로 작품을 만드는 유승현 설치도예가. 흙에 생명을 불어넣어 도자기로 탄생시키는 그의 작품에는 응축된 시간이 담겨 있다.
“오늘은 무얼 만들어 볼까 하다가 누군가와의 만남을 떠올리고, 그 사람한테 필요하거나 어울릴만한 종을 만들기 시작해요. 완 성된 종을 보면서도 이건 누굴 주면 좋겠고, 이건 누가 보면 좋아할 것 같고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요.”
그가 처음부터 종으로 작품을 한 건 아니었다. 첫 전시를 준비 하면서 ‘예술가가 느끼는 소통의 부재’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작가는 자신의 공간에서 몇 날 며칠을 고독과 싸우며 단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데요. 막상 전시는 작가의 작품을 대중들에게 알리고, 작업에 대한 행위를 보여줘야 하는데 ‘대체 어떤 기준으로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할까’라는 고민이 들더라고요. 친한 사이라고 해도 1년에 한 번도 연락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밥 한번 먹자’라는 인사만 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결국 저와 1년간 연락을 하고 소통을 한 이들의 이름을 도자기 종에 적어서 전시를 했어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그는 대형나무에 300여 개 이상의 종을 걸었고, 전시는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를 위하여’가 적힌 작품을 보며 초대받은 관객은 작품 속으로 빠져들었다. 기억에 남는 소통을 간절히 원했던 그의 전시는 예술적 행위로 관객들에게 각인됐다. -
‘하모니’를 이루는 작품들
피아노를 전공한 음악인이었던 그는 어쩌다 도예가가 되었을까? 그는 한국왕실도자기 도자장인 유인근 선생의 딸로, 어릴 때부터 흙 가마터에서 뛰놀았다. 하지만 수없이 깨지는 도자기들을 보면서 대를 잇겠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던 그는 ‘운명처럼’ 도예가가 되었다. 고운 흙이 그의 손을 잡아 당겼다고 한다.
“음악과의 만남이 종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보통 ‘종’이라고 하면 인테리어 소품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평범한 인식을 깨고 싶었어요. 저는 한 개의 종으로 작품을 완성하기도 하지만 여러 개, 수십 개의 종이 하나의 작품이 되기도 해요. 종이 모여서 내는 다채로운 종소리는 깊은 울림이 있거든요. 제가 추구하는 작품의 의미가 ‘하모니’인 것도 그래서예요.”
그의 작품은 예쁘고 반듯하게 잘 다듬어진 도자기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가 완성해낸 작품은 그 어느 작품보다 맑고 고운 소리를 낸다. 바로 만드는 과정이 특별해서다. 그는 실크 소재의 고운 흙을 곱게 부셔서 흙물로 작업하는데 미리 디자인해서 만들어 놓은 석고틀에 흙물을 부어서 종을 제작하는 방식이다. 최대한 얇아야 소리가 아름다운 종으로 만들 수 있다.
“핸드빌딩을 하거나 물레작업을 하는 흙은 입자가 곱지 않아서 제가 원하는 종의 울림을 만들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여러 번의 실험과 연구로 저만의 방법을 찾았죠. 종은 크기와 두께에 따라, 소재에 따라 그 울림과 느낌이 다르거든요. 작품마다 종 모양과 크기도 다른 것도 다 이유가 있어요.”
건조 후 가마에서 초벌구이를 하고, 드로잉을 하거나 유약으로 표면을 처리한다. 그는 50여 개의 유약과 물감을 직접 만들어서 사용한다. 이처럼 도자기 종을 만드는 과정 하나하나 녹록지 않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흙물로 종을 만들고, 그것이 잘 구워져 나왔을 때 느끼는 기쁨은 마치 조물주가 세상을 처음 만들었을 때의 그것과 같다고 한다.
예술가로서 의미 있는 만남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과 만나며 문화예술기획도 하고 있어요. 창작자로서 작품을 대중들에게 선보이는 일는 예술가의 기본자세죠. 더 나아가 시대적인 문화를 대중과 향유하고, 미래가치로 나아가는 작업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로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가 문화예술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전시와 강연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봄봄』, 『동백꽃』의 저자인 김유정 작가의 후손으로, 현재 김유정예술연구회 대표로 기념사업을 펼치고 있다.
“할아버지 선양사업은 김유정 할배가 남긴 예술적 뿌리를 찾는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 미래세대에게 이어가고자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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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무얼 만들어 볼까 하다가
누군가와의 만남을 떠올리고,
그 사람한테 필요하거나 어울릴만한 종을 만들기 시작해요.
완성된 종을 보면서도 이건 누굴 주면 좋겠고,
이건 누가 보면 좋아할 것 같고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요. -
올해는 그에게 유독 의미 있는 해였다. 진주문화관광재단의 초대로 ‘전시연출 아카데미’를 강연을 시작으로 경기문화재단의 ‘G Open Studio’ 선정작가가 됐다. 그는 아카이브 전시부터 작가의 정서를 전하는 작품으로 전시를 진행하는 등 의미 있는 전시를 기획했다. 시민들에게 그의 작업실도 오픈했다. 또 경기도 여주에 위치한 아시아 최초 민영교도소에서 수형자들과 축복의 종 작업을 하고 4개월간 전시도 했다. 11~12월에는 경상남도에 있는 ‘뮤지엄남해’ 개관 10주년 초대전으로 전시는 마무리한다. “올해는 의미 있는 전시와 강연이 많았어요. 내년에도 의미 있는 작업과 전시를 설레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간을 빼곡히 메운 집기와 작품들은 그의 시간과 20년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다음에는 어떤 작품으로 관객들과 만나게 될지 기대가 된다.#